오피니언
우리는 작았던 적이 없다
윤정인 다대고등학교 3학년
2025년 4월 4일, 나는 나쁜 마음을 먹으며 등교했다. 그러니까, 11시가 끼어 있는 3교시 수업 시간에 대통령 탄핵 선고 방송을 몰래 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예상외의 이야기가 들렸다. 부산의 학교들은 탄핵 심판 장면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금기시될 법한 탄핵과 계엄, 민주주의와 헌재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며 졸업 전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게 새삼 기뻤다. 학교가 정치 토론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건 나에게 있어 오래된 생각이었다. 정치 이야기가 아예 나오지 않게 하여 정치적 중립을 이룬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한 일이었기에. 이름만 둥둥 떠다니던 낯선 용어들이 현실로 들어오던 순간에 진심으로 기뻤다.
그 이틀 전인 4월 2일에는 부산시교육감 선거가 있었다. 투표율이 3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딘가 억울했다. 그리고 어색했다. 모든 선거가 그러하듯 만18세가 안된 우리는 선거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 지점이 참 어색했다. 교육을 받는 당사자인 우리는 민주주의의 터에서 멀어진 채 그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한강 작가의 돻소년이 온다돽를 읽으며 밑줄 친 문장이 빛을 발하여 인용한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중략)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새 시대의 정의를 다시 쓰고 있다는 마음과, 그 정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확신. 학창 시절을 보내며 쓰는 이 글은 4월 2일에 느꼈던 나름의 어색함과 4월 4일에 느낀 깨끗한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민주주의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란 `어른이 되어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둘은 확실하게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선택할 수 있는 범주가 넓어지는 동시에 짊어지는 책임도 무거워지는 것. 둘째는 성장할수록 불확실한 부분이 많아진다는 것. 그리고 원인이 무엇이든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는 것. 그건 민주주의에도 똑같은 일이다. 뽑지 않았으니 그 결과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참 느린 생각이다. 분명하게도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원치 않은 사람과 일을 완수해야 하는 때가 늘어난다. 민주주의 역시 똑같다. 민주주의는 전 세계, 전 인구를 대상으로 한 조별 과제다. 기한은 평생이다. 살아서 선택하고 싶다면, 또는 나름의 평등을 원한다면 제 몫을 해내야 하는 극악무도한 과제다. 게다가 현 세대 모두를 대상으로 한 과제인지라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그 엄정함과 비효율이 올바른 기반을 그려낸다. 어딘가 당당한 비효율이 그려낸 자유와 평등이란 것에서 그제야 우리는 효율과 생명을 저울질할 수 없다고 외친다. 그게 민주주의다. 한 명이 통치하는 것이 아무리 효율적이더라도 인간의 이름과 견줄 수 없다고 외치게 한 것. 성가실 정도로 생기는 책임이 민주주의 수호의 선명한 증거다. 그러니 광활한 민주주의의 벽 앞에서 나는 너무 작고, 사람은 많으니 손 놓아도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사회는 개인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개인은 사회를 만들 것이다. 당신의 옆을 지켜주는 가족과, 동료와 당신. 그 모든 삶의 정의가 민주주의를 빚을 것이다. 당신은 작지 않다. 나 역시 작지 않다. 우리는 작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당신과 내가 만들어갈 정의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정의라는 표현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삶'이라고 봐도 무관하며, `생존', 또는 `미래'라고 생각해도 좋다. 와닿지 않는다면 `외면'의 반대라고 읽어도 되며, `수동'의 반대라고 받아들여도 좋다. 외면하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면 달력의 6월 3일에 원을 그리고 `대통령 선거일'이라고 적어주지 않겠는가? 우리는 작았던 적이 없다. 우리는 나아간다. 당신의 정의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함께.
부산교육신문에 기재된 기고문은 필자의 견해이며 부산광역시교육청의 입장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