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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육 DNA부산의 민주길을 걷다
  • 2022년 여름 제102호
  • 조회수 : 63
  • 작성자 : 유비텍1

부산교육 DNA

부산의
민주길을 걷다

 

유승훈 역사민속학자

역사 속 부산에는 많은 고난과 억압이 있었고, 그 때마다 부산 사람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맞섰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군사 독재 시절에는 자유와 민주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다. 부산 사람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 은 1979년 부마민주항쟁으로 폭발했다. 부마민주항쟁으로 최악의 유신 독재 체제는 막을 내렸지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짓밟고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다시 철창 속에 민주주의를 가두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전두환 정권에 의하여 시들어가는 민주주의를 일으키기 위한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이었다. 민주주의의 열망으로 가득했던 그때의 부산을 떠올리며 유월길을 함께 걸어보자.
  부산민주공원 전경

부산민주공원 전경

부산민주길을걷다

‘부산민주길을 걷다’는 학생들이 부산의 주요 민주화 운동과 그 장소를 다양한 활동과 함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워크북으로 ‘사월길’, ‘부마길’, ‘유월길’로 구성되었다. 부산광역시교육청(기획), 부산민주항쟁기념재단(집필책임)

 

  민주화 역사의 심장부, 부산민주공원

넋기림 마당

넋기림 마당

민주의 횃불 (뜻기림 횃불)

민주의 횃불 (뜻기림 횃불)

민주항쟁기념관

민주항쟁기념관

상설전시실 (늘펼쳐보임방)

상설전시실 (늘펼쳐보임방)

 

수정산에서 구봉산으로 이어지는 굵은 산줄기가 갑자기 좁아지다가 끝을 맺는 곳이 보수산이다. 이 보수산 정상에는 충혼탑, 중앙공원, 민주공원 등 여러 시설이 모여있다. 그중 부산 민주화 역사의 심장부가 된 민주공원은 1999년 개관했다. 민주공원은 부산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조직한 부산민주항쟁기념 사업회가 이룬 최고의 결실이었다. 민주공원은 항일투쟁에서 4.19 혁명, 부마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부산 사람의 민주와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민주공원에는 민주항쟁기념관을 비롯하여 ‘민주의 횃불’과 같은 상징조형물, 야외공연장 등이 있다. 특히 민주공원은 부산시민의 민주주의 학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공원 내 부산민주항쟁기념관은 부산 민주화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한 전시회, 강연회, 토론회 등을 열고 있는데, 민주화 역사와 민주주의 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6월 민주항쟁의 불씨, 박종철 학생의 추모비

박종철 열사 추모비

박종철 열사 추모비

박종철 열사

박종철 열사

 

서울대 박종철 학생의 고문치사 사건은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게 된 불씨 였다. 1987년 새해 벽두에 일어난 이 사건은 전 국민을 분노하게 했다. 경찰 당국은 박종철 학생이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갑자기 책상을 ‘탁’ 치니 ‘억’ 하며 쓰러져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경찰 수사관들의 심한 고문으로 인하여 숨진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고문 은폐 시도는 되레 전 국민을 민주항쟁의 도가니로 이끌었다. 박종철은 부산 아미동 출신으로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박종철은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노동운동을 준비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박종철이 고문으로 숨진 게 밝혀지자 부산 사람들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산의 민주단체들은 잇달아 성명을 발표했으며, 2월 7일에 열린 박종철 열사의 추도회에도 많은 시민이 참석했다. 이처럼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고문을 규탄하는 활동은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보수산 서쪽 가까이에 있는 박종철의 모교 혜광고등학교 교정에는 2004년 박종철 추모비가 세워졌다. 펜 모양을 닮은 추모비에는 이산하의 시가 적혀 있다. ‘당신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나는 아직도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라는 시 구절이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게 한다.

 

  6월 항쟁의 구심점, 부산가톨릭센터

부산가톨릭센터

부산가톨릭센터

6월 민주항쟁 기념 표석

6월 민주항쟁 기념 표석

 
 

국제시장에서 중구청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흰색 10층 건물과 만날 수 있다. 이 건물은 6월 항쟁 당시 가장 뜨거웠던 장소, 부산가톨릭센터이다. 가톨릭센터는 천주교 부산교구의 문화센터로 지어졌다. 각종 공연, 전시, 강좌, 음악회 등이 열려 부산시민들이 자주 방문했던 곳이다. 6월 항쟁 시절 천주교 사제들은 누구보다 앞장서 투쟁했다. 박종철 사건의 진실이 은폐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폭로한 단체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6월 10일 전국적으로 범국민대회가 개최된 후 서울의 시위대는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15일까지 농성을 했다. 명동성당 농성이 끝난 즈음에 바통을 이어받은 곳이 부산의 가톨릭센터였다. 6월 16일 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대청동과 보수동 등지에서 강력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과 대치하던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고, 그중 350여 명은 가톨릭센터로 들어가 22일까지 장기 농성을 이어갔다. 이후 가톨릭센터는 6월 항쟁의 전국적 구심점으로 부상했다. 가톨릭센터 농성단은 조를 나눠 체계적으로 농성을 진행하고, 옥상에서 성명서를 배포했다. 시민들은 음식과 편지, 시위용품을 보내는 등 가톨릭센터 농성에 적극적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었다. 6월 항쟁 시절 부산의 가톨릭센터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언론들도 크게 주목했던 민주화의 성지였다



 

  반미운동의 역사가 담긴 부산근대역사관

부산근대역사관

2023년 부산근현대역사관으로 재개관 예정인 부산근대역사관

 

중구 대청로에 있는 부산근대역사관은 원래 일제강점기 대표적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었다. 해방 후에는 부산미문화원으로 사용되다가 1999년 시민들의 적극적 반환운동으로 우리나라의 품으로 돌아 왔고 지금은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이 아직 부산미문화원이던 1982년 3월, 예상치 못한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문부식, 김은숙 등 몇 명의 대학생들이 부산미문화원을 점거하고 불을 낸 것이다. 당시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던 미국의 용인 없이 신군부가 진압 작전을 위해 광주로 군대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신군부 쿠데타를 묵인하고 5.18 광주학살을 용인한 미국을 비판하며 방화를 했다. 그런데 방화사건으로 부산미문화원에서 공부하던 대학생 한 명이 사망하게 된다. 이에 정부는 비상근무령을 내리고 방화에 가담한 학생들을 검거 및 수배했는데 이 과정에서 사건과 무관한 천주교 인사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미국의 신군부 쿠데타 묵인에 대한 항거이자 이후 종교계의 민주화 운동을 촉발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방화라는 폭력적인 방법과 그 과정에서 무고한 대학생이 사망하면서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월길은 부산민주공원, 박종철 추모비, 부산가톨릭센터, 부산근대역사관을 지나 영도 한진중공업 합동 추모비까지 이어진다. 유월길을 따라 걷다 보면 6월의 여름 햇빛만큼 뜨거웠던 그때의 부산 민주화의 함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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