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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육 DNA피란수도 부산과 천막학교
  • 2020년 겨울 제96호
  • 조회수 : 554
  • 작성자 : 유비텍1

부산교육 DNA

피란수도 부산과 천막학교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김한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3년간 이 땅을 피로 물들인 전쟁은 휴전회담을 통해 총성만 멈추었을 뿐 여전히 진행형으로 남아있다.부산은 한국전쟁 3년 기간 중 1,023일간 피란수도로서 국가의 영속성은 물론 교육의 영속성을 유지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피란 학교, 노천학교, 천막학교 등의 다양한 명칭의 학교는 물론 전쟁 중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사의 한 부분을 장식하는 중요 정책들이 수립되었다. 3년간 전쟁의 포화 속, 열악한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은 교육에 대한 집념은 피란수도 시기 부산교육의 위대한 DNA로 기억될 것이다..

▼<1951년 9월 부산 피난지 학교>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단

1951년 9월 부산 피난지 학교
  • 해방 후의 교육 관련 법령과 조치, 시행령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역사는 조선의 교육을 지배하려는 일본인들의 의도에 따라 제정한 「조선교육령」에 의해 비롯되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학무국의 자문으로 조선교육심의회를 구성하여 교육체제 전반을 새롭게 재구조화하면서 현대적 교육체제를 구상했다. 이때 새로운 교육이념으로 ‘홍익인간’을 확정하고 국민의 교육 권리보장과 공정한 교육 기회 부여, 새로운 학제 구축과 민주적인 교육행정 조직 구축 등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지속되었다.

     

    이후 1948년에 제정된 「헌법」에 명시된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초등교육은 의무이며, 무상으로 한다.”를 바탕으로 1949년 「교육법」이 제정되었다. 「교육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현대적인 국가체제 형성에 맞는 교육 관련 제도를 담아 1949년 12월 31일 법률 제86호로 공포되었다.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 중에도 「교육법」에 따른 각종 조치와 시행령은 이어졌으며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 이후 3년의 미군통치를 거쳐 1948년 8월 대 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제1공화국의 대한민국 정부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 강화와 영구적인 집권을 위해 강압적인 독재정치를 펼쳤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반공을 빌미로 야당과 반대세력을 더욱 탄압하고 부정선거를 통해 집권 연장을 꾀하였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 의 부정부패는 날로 심해지고 민생은 피폐해져 갔다. 급기야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집권당이 공공연히 부정선거를 행하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마산에서 일어났다. 이 때 시위 도중에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김주열 학생 의 시신이 며칠 뒤 마산 앞 바다 위로 떠올랐다.

     

  • 피란수도 부산 그리고 피란학교들

    1953년에는 문교부에서 <의무교육 6개년계획수립 실시에 관한 건>을 추진했다.한국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지만 이처럼 각종교육 관련 조치와 시행령 등을 제정 공포한 것은, 모든 국민이 과거 식민지 지배 체제 교육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국가체제 형성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인 식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특히 1951년 5월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조치령」에의하여 전시연합대학이 부산, 광주, 전주, 대전 등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고등교육의 지방 분산과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시에서는 고급 요정, 카페, 바 등과 시내극장의 휴업을 지시하고 26일부터는 국민학교, 중학교 1·2학년생, 공민학교와고등공민학교, 도서관 등에 대해 무기한 휴학 또는 수업 정지 조치를 내렸다 (부산일보, 1950년 6월 27일 자). 이후 전세가 밀리면서 다른 지역도 속속 휴학조치가 취해졌고, 개학 예정일이 무기 연기되면서 여름방학 또한 무기 연기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산은 각종 군수 보급물자 하역뿐 아니라 후방지원 기지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50년 8월 18일 부산이 피란수도가 되면서 정부가위치한 안전한 곳으로 여긴 피란민들은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1·4후퇴 이후에더 많은 피난민들이 남하하면서 부산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피란학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20일 서울사대부중이현재 중구 보수동 보수공원에 피란학교를 최초로 개교했다. 이후 보수동 산자락에 서울사대부중 외 5개 학교, 영주동에는 중앙중과 마포중 등 2개 학교, 용 두산공원 기슭에 한성중 외 5개 학교, 초량동에 숙명여중 외 6개 학교를 포함하여 영도, 송도, 아미동, 대신동, 남부민동, 충무동, 수정동, 서면 등 부산 시내곳곳에 총 75개의 피란학교가 세워졌다. 학교는 부산지역 국민학교의 분교장을 설치하여 개교하기도 하고, 중등학교는 단독 혹은여러 학교가 연합해 피란학교를 개설하여 수업을 계속했다.

     

    이렇게 부산 곳곳에 피란학교가 마련된 상황에서 부산에 소재한 각급 학교들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피란학교를 운영했다. 천막이라도 구할 수 있었던 학교는 그나마 다행이었으며대부분 노천에서 땅바닥에 앉아 수업을 진행하였고 학습을 위한 교재도 임기응변책으로만들어 보급했다.

     

    교부는 1951년 1월 5일 부산시청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피란 학생들의 학업 지속을위해 ‘전시교육방침 및 학사행정 등 당면 문교행정에 대한 방침’을 제시하고, 2월 16일 ‘전시하 교육 특별조치요강’을 제정·발포하여 전란으로 인한 학교 교육의 제반 애로를 타개 하는 데 노력했다. 이러한 혼돈 상황 속에서도 1951년 9월 1일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신학제를 개편하여 현재와 같은 6-3-3-4제의 학제가 수립되었다.

 

여학교의 노천수업

▲ <여학교의 노천수업>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부산 피란학교의 이런저런 사연들

  • 전쟁 중 피란학교 개설은 쉽지 않았다. 학교 부지가 정해지면 여학생들은 돌을 캐내고, 남학생들은 판잣집을 지었으며 미군 부대 등지에 찾아가 대형 군용텐트를 구걸하다시피 얻어야 했다. 학교를 개설하기 위해 교사와 학부모, 관계 당국, 학생이 모두 힘을 합쳐야만 했다. 장소를 확보하지 못한 일부 학교는 창고나 정원이 넓은 가정집을 빌려서 운영하기도 했으나 교사(校舍)는 부족했다. 1951년 6월 하순 문교부는 미8군과 UN민사처를 통해 자재를 지원받아 생벽돌을 사용하여 교실 1천 개를 수용하는 교사 건축을 시작했다 부산 지역 피란학교 대부분은 서울에 근거를 둔 학교였고, 타지방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에 불과했다.북한 지역에서 온 피란민들은 정착지 인근에 위치한 학교에 자녀들을 보냈으며, 그중에서 좌천동에 집 단 수용되어 있던 황해도 피란민 600여 명은 자녀 교육을 위해 직접 교사(校舍)를 만들어 분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은 교사 건축기금 350여만 원을 모집하여 공지 15평에 가교사를 신축하고 시설을 완비하여 1952년 4월 7일부터 성남초등학교 분교장으로 피란 아동 80여 명을 데리고 와 개교했다.

  • 많은 피란학교들은 냉난방은 엄두도 못 내는 상황에서도 학업을 지속했으며, 별도 화장실을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피란민 집단 수용소 인근 학교들의 경우 여름철에는 공동화장실에서 나는 악취로 인해 수업 중에 엄청난 곤욕을 겪기도 했다. 옛말에 1년을 내다보는 삶이라면 농사를 짓고 10년을 내다보는 삶이라면 나무를 심고 100년을 내다보는 삶이라면 교육을 먼저 생각하라고 했듯이, 피란 시절에 다 함께 노력한 교육에 대한 열정과 집념은 오늘의 풍요로운 삶을 이룬 큰 원동력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부산 중구 영주동 영주배수지 옆 봉래초등학교 박간산 천막교실

▲ <1950년대초 부산 중구 영주동 영주배수지 옆 봉래초등학교 박간산 천막교실>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 참고문헌
「한국전쟁기 임시수도 부산지역의 피난학교연구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안경식, 2009년
「부산시·부산교육연표 -내사랑부산 자료모음 제12호-」, 부산광역시립중앙도서관, 2013년
「국가기록원 소장 주요정책기록해설집 -교육편-」, 국가기록원, 2017년
「부산일보」, 1950~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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